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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글과 그림 중 어떤 것이 힘이 더 쎌까?

이영란

이영란 갤러리 단정 대표, 전 KTX 매거진 편집장


(194) 글과 그림 중 어떤 것이 힘이 더 쎌까?



백남준이 유준상에게 보낸 연하장, 1989, 31×43, 유준상 기증

갤러리 문을 열고 나서 못하게 된 최애 취미생활 중 하나가 갤러리방문이다. 갤러리를 잘 하기 위해, 혹은 갤러리를 지키느라 다른 갤러리를 더 못 가보는 아이러니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그래도 꼭, 아무리 바빠도 가보고 싶은 전시는 어떻게든 짬을 내 챙겨본다.

최근 열린 전시 중 가장 가보고 싶었던 전시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이만, 총총:미술인의 편지>였다. 글이 그림 못지 않게 큰 힘을 지니고 있음을 믿고 살아왔던 나에게 과거 미술인들이 어떤 문장을 짓고 손편지를 썼는 지는 당연히 큰 흥미거리다. 또 갤러리스트 입장에서 문학과 미술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지난 6월 21일 토요일 오후 김달진 관장님의 배려로 문 닫힌 미술관의 문을 열고,  '나 홀로 관람'할 기회를 얻었다. 

맨 먼저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입구에 전시된, 소박한 노란색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였으나 37세 요절한 박길웅 화백의 아내, 박경란 작가가 외동딸 박승리 작가에게 보낸 편지다. 짧은 글이었지만 행간 가득 엄마의 사랑이 또박또박 느껴졌다.

'승리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야. 사실, 예술가로서 어쩌면 딴 세상에 살고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발을 땅에 붙이고 사는데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현실에 무관심한 것은 옳지 않아. 그래서 화가는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캔버스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어. 그 사람이 화가야......2004년 박승리 엄마 박경란.'


김환기가 신종섭에게 보낸 엽서, 1962.9.4, 15×11, 1장, 신종섭 기증

전시장 내부에는 김환기 화백이 군에 복무중인 제자 신종섭 작가에게 보낸 엽서가 고이 모셔져있는데, 작성 연도가 1962년 9월4일인 것을 보니 무려 63년 전 쓰여진 것이다. 남다른 제자 사랑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소략)부디 명랑하고 아름다운 몸을 잊지 마소. 자네들은 훌륭한 예술가가 될 것일세. 부디 건강하고 유쾌히 군무가 되도록 심축하네.'

백남준이 유준상 작가에게 보낸 연하장, 그 외 편지와 엽서들은 독특했다. 기호의 나열이나 행의 배열이 기존의 틀과 전혀 다른 방식이고 글이라기 보다는 캘리그라피 혹은 퍼즐이라 그에게는 삶이든 작품이든 창의적 발상이 타고난 습관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윤경렬이 김종휘에게 보낸 편지, 1960.5.19, 18×19, 3쪽, 봉투 1부, 김정민 대여


가장 반가웠던 전시품은 '살아있는 신라인'으로 추앙받았던 윤경렬 선생님께서 1960년 쓰신 편지였다. 문득 추억이 와르르 몰려왔다.
30여년 전 나는 국내최고의 여성 사극드라마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경주 남산 아래 윤경렬 선생님 댁을 무작정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화랑세기에 기록된 '미실'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는데, 윤선생님은 생면부지에 치기 가득한 애송이 드라마작가 지망생을 내치지 않으셨다. 오히려 책 선물도 주고 '큰 작가가 될 것이니 걱정말고 써보라'응원도 해주시고 따뜻한 차도 내주셨다. 짧은 시간이었고 이후 더는 뵙지 못했지만 내게는 소중한 인연이었다. 
그 윤경렬 선생님의 친필을 직접 대하니, 마치 그날 한옥에서 하얀 모시적삼을 입고 배웅하시던 모습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미실과는 인연이 아니었는지, 윤선생님이 주신 그 귀한 자료를 올라오는 경주역에서 분실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글을 못썼고 집필하던 신라 사극 드라마는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이밖에도 한문이 많아 잘 읽을 수는 없지만 정성 가득한 편지들, 천경자 화백의 그림 연하장, 서상환 작가가 평론가 옥영식에게 보낸 편지 등 당대 화가들의 고뇌와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편지글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한 장 한 장 그 편지들을 황송해하며 읽었다. 그림처럼 글씨 한 자 한 자에 그분들의 얼이 깃든 듯 숭고함이 느껴졌다.

나의 책상 서랍에도 그간 받았던 손편지와 카드들이 누워있다. 잠이 안오는 날 밤이면 가끔 꺼내 읽으며 추억을 되새기는 데는 사진 보다 더 친절한 최고의 매개체임은 분명하다...오늘 퇴근길에 문구점에 들려 예쁜 편지지를 사다 모처럼 손글씨 편지를 써봐야겠다.


김달진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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