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무안군오승우미술관 사운드아트 기획초대전
<청각적 탐험가들>
전시기간: 2025. 5. 31.(토) ~ 2025. 8. 31.(일)
운영시간: 9:00 ~ 17:30(매주 월요일 휴무)
참여작가 : 김영섭, 이예린
기획의 글
요즘 현대미술이 점점 확장되어가고 있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운드 아트’라는 전시가 부상하고 있다. ‘사운드 아트(Sound Art)’는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지만, 형식적으로 보자면 미술의 주요 영역인 시각적 형식 속에 ‘사운드’라는 청각적 매체가 들어와 융합되는 특징을 보인다. 미술이 이처럼 시각적 영역뿐만 아니라 반망막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청각적 요소가 개입되기까지는 간단치 않은 미술사와 음악사적 맥락들이 존재한다.
미술과 음악이 융합되기 위해서는 각기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는 전통의 틀을 깨고 길을 내어주는 전위적인 흐름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 것이다. 미술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이러한 흐름은 시각중심의 재현적 미술로부터 벗어나 비가시적 영역인 ‘정신’을 다루었던 추상미술의 등장, 그리고 뒤샹이 반망막적인 ‘인식의 전환’으로 개척해낸 개념미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음악의 역사에서는 루이지 루솔로와 같은 이탈리아 미래파 작가들이 기계문명에 대한 추앙으로 공공연하게 벌였던 소음공연과 무조음악을 창시하여 음렬주의를 해방시키고 현대 음악의 문을 열었던 쇤베르크, 그리고 존 케이지의 플럭서스 운동 속에서 ‘사운드’라는 매체가 자리 잡게 된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두 영역의 변화와 융합에 대한 이러한 복잡한 설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퍼포먼스가 존재하는데, 바로 1968년 미국의 토론토에서 개념미술의 선구자인 뒤샹과 <4분 33초>라는 무연주 피아노 공연으로 전통음악의 캐논을 전복시킨 존케이지가 협업한 <재회(reunion)>라는 체스 공연이다. 공연장의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뒤샹과 케이지가 두는 체스 말이 움직이는 장면이 여러 대의 TV 모니터에 투사되는 영상을 보면서 체스 말이 이동할 때마다 기계적으로 확장된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게 되는 사운드를 동시에 듣게 되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나 ‘白文不如一見’이라는 한자어는 모두 시각중심의 감각만을 진리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각은 계몽주의나 데카르트 형식주의의 근간을 이루었다. 몸의 다른 감각에 대한 탐험은 이러한 시각중심의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내었으며, 신체의 경험을 중시하는 현상학으로 발전해나갔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은 결국 현대 철학자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보다 ‘비가시적인 영역’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는 인식을 이끌어낸다. 예를 들면, 독일 철학자인 벤야민은 하나의 이념 아래에는 감추어진 수많은 현상이 마치 성운처럼 존재한다고 하였고, 라캉은 무의식이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의식에 비해 바다 아래에 감추어진 끝을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하였다. 또한 들뢰즈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주름이 잠시 펼쳐놓은 표면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존케이지나 백남준 등을 중심으로 미술과 음악의 범주를 확장하려고 했던 과거 플럭서스의 실험은 이제 다양한 미디어와 테크놀로지가 결합하면서 진화 중이다. 2000년 이후 최근의 ‘사운드아트’ 전시에서 사운드는 더 이상 시각예술에 부속된 미디어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로 다양하게 다루어지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마샬 맥루언이 이야기하고 있는 ‘음향적 공간(acoustic space)’처럼 엄청나게 발달된 대중매체나 SNS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주체에 의해 포착이나 분리할 수 있는 시각적 영역과는 달리 어쩔 수 없이 동시적으로 듣게 되는 청각적 데이터의 수많은 공세 속에 놓이게 된 환경은 현대사회에서 자본이나 권력의 새로운 작동방식을 일깨워준다.
이번 무안군오승우미술관 사운드아트 전시 ‘청각적 탐험가들’은 김영섭, 이예린 작가를 초대하여 회화, 영상, 사진, 설치 등 시각적 미디어와 청각적 요소인 ‘사운드’라는 매체가 결합된 현대미술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청각적 매체는 시각 중심의 모더니즘 철학에 저항하면서 절대적인 믿음을 해체하고 보이지 않는 영역들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해준다. 동시에 시각처럼 선형적이지 않고 우리의 귀에 동시에 울리게 되는 수많은 음향적 데이터들 속에서 새롭게 생산되는 현대사회의 관계망과 권력의 양상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를 소환하며 새롭게 작동하는 이데올로기 등 그 다양한 면모들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안군오승우미술관장 박현화
김영섭 Kim, Young sup
소리-설치작업으로 알려진 김영섭은 채집가이자 작곡가이다.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낸다기보다 일상의 소리를 선택하여 ‘채집’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와 작업을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얼핏 보면 오브제에서 소리가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작업에서 소리는 일종의 오브제로 작용한다. 소리는 오브제처럼 선택된-채집된-일상의 질료들인 것이다. 그는 이같은 날것의 소리를 약간의 조작을 거쳐 작곡하여 새로운 상황으로 바꾼다. 소리의 크기와 강약을 조절하고 가공한다는 점에서는 작곡자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는 일상에서 채집된 소리라는 점 때문에 소리가 발생된 상황과 개념 자체를 담고 있다. 더불어 소리는 그것이 놓인 상황과 재현된 오브제와 함께 작용하여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는 소리를 드로잉이나 설치 등 일종의 기호로 시각화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했다. 초기작을 통해 그가 단순히 사운드가 아니라 리듬 혹은 규칙적인 운율에 관심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자판 두들기는 소리, 마우스 클릭 소리 등 이후 그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소리들은 대부분 박자에 기반한 불확실한 소리 기호들이다. 그것은 불규칙하고 가공되지 않은 날 것-소리들-을 다시 혼합하고 어느 정도 사운드 디자인의 과정을 통해 ‘음악화’ 시킨다. 일상의 불규칙한 소리들을 잡아내고 혼합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어떤 틀과 형태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작가는 케이블 선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오브제 모형 둘레를 감아 올려 형상을 부여한다. 케이블 선과 스피커는 소리를 출력하는 기능과 시각적으로 재현된 오브제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는 오브제와 소리의 관계 등 복잡한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사운드와 오브제를 그리고 관람자의 위치가 형성되고 신호를 주고 받는 관계에 주목하여 소리는 오브제에 오브제는 소리에 그리고 관람자가 서로 개입하고 간섭하도록 모든 장치와 상황을 연출한다.
(...) 그의 작업에서 소리는 신체의 경험으로, 소리의 발생지로서의 신체는 관람자의 신체로 전이된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상황의 경험으로 이루어진다. 고립된 사운드가 아닌 오브제와 공간 속에서 신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총체적 경험이 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언어, 컴퓨터 기계음, 기계와 인간의 언어를 대체하는 사운드로 전이되며 소통과 부재의 감각을 경험케한다.
사운드가 완전히 탈문맥화된 채 변화되고 왜곡된 음으로서의 소리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녹음 중 유입된 잡음의 여과만을 거쳐’ 그 문맥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문맥이 사회적 강요와 관계에 관한 내용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어떤 억압된 개념과 감정, 욕망 등 삶의 배설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직설적이고 분명하게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징후나 불확실한 상황처럼 여겨지며 관람객의 신체는 그가 만들어 놓은 우회적 상황극 속에서 관람자는 작가가 연출한 상황과 소리의 파동을 신체로 느끼며 자신의 기억에 기반한 보편적 사실과 감각 사이, 의미와 무의미,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를 유영하듯 가로지른다.
이렇듯 미묘한 차이와 의미의 이동으로 조금씩 어긋나며, 틈새에 놓여지는 김영섭의 작업은 부조리한 일상을 암시한다. 이를 위해 언어나 소리를 음절로 해체하고 등장인물을 상실시키기도 하여 행위의 뜻과 목적을 박탈하는 부조리극처럼 일종의 개념적 부조리를 사운드인스톨레이션으로 시각화한다.
-김우임(전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웅얼거림의 미학> 중에서 발췌·편집됨.
이 예 린 Lee, Ye leen
이예린의 작품은 영상, 사운드, 퍼포먼스, 사진, 회화, 설치 등 다양한 매체들을 넘나든다. 그녀에게 미디어의 조건은 재료에 대한 익숙함이나 숙달된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우연적이거나 파편적인 혹은 역전된 실험과정의 어떤 단계’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매체보다 생각이 더 중요한, 소위 ‘개념미술가’이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형식을 넘나드는 작품들의 상당수는 ‘사운드’와 융합을 이루고 있다. 청각적 요소들을 다루고 있는 그녀의 작품들은 시각적 재현에 대한 저항 혹은 대항적 의미를 생산해냄으로써 뒤샹이 시작한 개념미술에서 쉰베르크, 존 케이지와 백남준으로 이어지는 플럭서스 운동, 그리고 요즘 한참 부상하고 있는 현대 사운드 아트의 미술사적 계보를 잇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예린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두 개념은 ‘거울’과 사운드에 가까운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피아노 전공자로서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큰 거울이 있던 피아노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했던 경험으로부터 기인되었다. 반복되는 피아노 연습의 힘들고 지루한 일상을 반영하면서도 다른 세계를 꿈꾸게 만들던 거울은 일상과 환상, 반영(대칭)과 일루전, 오인과 나르시시즘의 비교/대조의 방식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세계에 대해 생각하도록 작가를 이끌었던 셈이다.
이처럼 거울을 통해 세계를 독해하는 그녀의 독특한 코드는 그녀의 작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피아노는 거꾸로 역전된 악보를 연주하고,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서 과거의 공간이 되살아나며 주변의 소리는 분절되어 알 수 없는 소음으로 변한다. 바닥을 두드리는 공의 사운드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지하 세계의 존재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며, 바닥에 고인 빗물에 반영된 세계가 현실처럼 역전되어 물체의 실재를 반영과 재현의 오인과 모호함 속에 가둔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거울의 반영과 재현 그리고 실재 세계의 사이에 상상과 반전, 유희와 역설에 관한 다층적인 미학을 여러 매체를 통해 마치 키아즘의 구조처럼 펼쳐놓으면서 ‘시각’에 관한 절대적인 믿음의 영역을 해체시킨다. 미술의 영역에 들어온 사운드가 시각이라는 주류적인 감각에 대한 반성과 함께 청자 주체의 현상학적 의미와 미시적 일상을 부각시키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속하는 영역으로 우리를 초대한다.